전두환 일생, 어린시절부터 12.12 군사반란, 사망까지 알아보자

전두환


전두환의 어린시절

경상남도 합천군 율곡면 내천리 태생으로, 형제는 원래 6남 5녀이나 성인이 될 때까지 요절하지 않고 살아남은 사람은 셋째 형 전기환과 본인, 그리고 남동생 전경환과 누이들뿐으로 총 3남 5녀이다.

4세 때인 1935년에 대구시로 가족이 이주하여 학창시절을 대구에서 보냈다. 때문에 경남 출신이지만 PK가 아니라 TK 계열 정치인으로 분류된다. 대구공업고등학교를 졸업했는데, 이 때문에 전두환과 관련해서 대구공고와의 역사가 많다. 특기할 점이라면 어릴 때부터 싸움을 잘해 고등학생 시절 대구의 학교들을 주먹으로 평정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는 훗날의 친구이자 정치적 동반자, 그리고 적이 되는 노태우와는 상당히 다른 모습을 보인다.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게, 전두환은 대구공고에서 축구부였고 포지션은 골키퍼였다. 어렸을 때부터 축구로 몸이 엄청나게 단련되어 있어서 싸움을 잘할 수밖에 없는데, 특히 다리 힘이 엄청났다고 한다. 그런데다가 강인하기만 한 게 아니라 넉살이 좋고 자기 사람으로 만드는 능력이 탁월했다. 싸움실력이 뛰어난 데다가 사람들을 모아 다정하게 잘 구슬리는 능력까지 뛰어났으니, 무리를 만들어 두목이 되기 매우 유리했다.

이후 1951년에 전두환은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한다. 4년제 정규육사의 첫 기수였기 때문에 입학 당시엔 육사 1기라는 명칭으로 입학했지만 나중에 육군 수뇌부가 육군 초창기 장교들에 대한 예우와 사기 진작 차원에서 그전까지의 임시육사 기수들을 육사 1~10기로 쳐주기로 하고 정식 기수들을 부여하면서 전두환의 정규육사 1기는 11기로 수정되어 밀려나는 바람에 졸지에 11기생이 된 육사생도들이 격렬히 항의했지만 결국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 이후로도 육사 11기생들의 임시육사 세대 선배들에 대한 은근한 무시와 상호 갈등은 계속되었고, 이는 나중에 11기생들을 주축으로 한 신군부 세력의 탄생과 12.12 군사반란의 한 원인이 되기도 한다.

전두환은 운동 실력 및 강인한 카리스마와 사람들을 잘 이끄는 성격이 시너지효과를 일으켜, 육사 동기들 중에서 조차 항상 리더 역할을 했다. 심지어 같은 동기인데도 육사 시절부터 정호용과 김복동 정도를 제외하면 전두환에게 존댓말을 썼다고 한다.

주말에 생도들끼리 축구시합을 끝내고 나면 동기들을 전부 모아다가 당시 육사 교장의 사택에 방문해서 교장을 설득해 잔치를 베풀게 했다는 에피소드도 있다. 다만 육사 입학 성적은 좋지 않아서 충원합격으로 겨우 입학하였으며, 졸업 등수도 낮아서 156명 중 121등이었다. 이때 노태우는 67등.





5.16 군사정변 이전

1955년 육사 졸업과 동시에 육군 제25보병사단에서 소대장으로 첫 군생활을 시작했고, 그 후 제21보병사단에서 근무한 뒤 1957년에서 1958년까지 육군보병학교 교육연대 구대장을 거쳤다.

1959년 초에 미국 특수전 파견교육 장교로 선발되어 육군 고급부관학교 제46기 군사영어반에 입교해서 1959년 4월에 수료했다. 1959년 5월에 육군 제1공수특전단 본부에 배치되었다. 같은 해 6월에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주 포트브래그의 미육군 특전단(그린베레)으로 군사유학을 가서 특수전학교(Special Warfare School)와 심리전학교(Psychological Warfare School) 이 두 교육을 수료한 뒤 연말에 귀국했다. 참고로 이때 미 특수전학교에 전두환과 같이 유학 갔던 장교인 이영진 씨(육사 12기)가 쓴 회고담에 전두환의 당시 성격 등이 묘사돼 있다.

이듬해인 1960년에도 다시 미국으로 군사유학 가서 조지아 주 포트베닝의 레인저 스쿨(Ranger School)을 이수했고, 그 다음에 미 육군보병학교에서 유격훈련 교관교육도 받았다.

그 뒤 귀국하여 제1공수특전단 제1특전대대의 대대본부에서 작전과장으로 근무하다가 이듬해 1961년 대한민국 육군본부 특전감실 기획과로 발령받아 육본에서 근무하였다. 그러던 중 육군 ROTC 창단 준비위원으로 발탁되었고 그 뒤 서울대학교 문리대학의 ROTC 교관으로 선정되어 서울대학교에서 근무하였다. 바로 이때 5.16 군사정변이 발생한다.

흔히 전두환은 특전사에서 근무했으므로 군생활 하나는 빡세게 한 거 아니냐는 오해가 일부에서 있는데, 이 시기 전두환이 특전사에서 근무한 건 불과 2년도 채 안 되며, 그것도 그 중에 많은 기간을 부대에 있지 않고 미국 군사유학을 나가 있어서 한국 특전사에서 실제로 근무한 기간은 더더욱 얼마 안 된다. 게다가 한국 특전사에서 근무한 것도, 팀원들과 같이 구르며 빡센 훈련을 받고 작전을 뛰는 팀(중대)이나 지역대에는 한 번도 있지 않았고 특전단 본부 아니면 대대본부에서 편한 행정업무만을 봤다. 귀한 나라 돈 들여 미국 본토의 고급군사교육을 여러 개나 보내주는 특혜를 받았지만, 정작 한국 특전사로 돌아와서는 편한 행정업무만 잠깐 보다가 육본과 서울대 ROTC로 떠나버린 바람에, 제대로 빡센 군생활을 하거나 국군 특수전 분야의 발전에 실질적인 큰 기여를 한 것은 별로 없는 셈이다. 물론 발령받은 곳으로 가야 하는 군인 특성상 전두환 본인 잘못은 아니지만...





5.16 군사정변 당시

5.16 당시 전두환은 군이 아닌 서울대학교에서 근무하고 있었기 때문에 군사정변에 직접 참가하진 못했다. 뒤늦게라도 기여해서 쿠데타 세력에 끼고 싶었던 전두환은 '젊고 정의로운 이미지의 육사 생도들이 5.16에 대한 지지 선언을 한다면 국민들이 "혁명"의 정당성과 정통성을 인정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지지선언과 지지행진을 이끌어내기 위해 육사로 향했다. 육사교장 강영훈 중장은 여러 이유를 들어 생도들을 "혁명" 지지 시위에 동원하는 것을 거부했지만, 전두환은 강영훈 교장이 장교와 생도들에게 금족령을 내려 지지시위를 방해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군부혁명 본부는 전두환의 편을 들어주고 강영훈은 구금되었다. 결국 18일, 육사 생도들은 육사 선배인 전두환의 설득과 강압에 넘어가서 군부혁명 지지 시가행진을 하였고, 이는 5.16 군사정변의 정당성 부여에 도움을 주었다. 이 공으로 전두환은 박정희의 신임을 얻어 국가재건최고회의 비서관이 되었다. 이때 그의 계급은 고작 대위, 나이도 겨우 30살이었다.





5.16 군사정변 이후

1962년 전두환은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전역하고 국회의원으로 정계 입문하라"는 제의를 받았지만, 그는 "군대에도 충성스러운 사람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라며 거절했다. 그리고 전두환과 몇몇 동기생들이 조직한 육군 내 사조직이 하나회로서 확립 되는 것도 이 시기이며, 전두환과 하나회는 군대 내부의 박정희 친위대를 표방하며 정권의 비호를 받고 계속 승승장구한다. 당시 소령, 중령이었던 전두환은 중앙정보부 인사과장, 육군본부 인사참모부, 제1공수특전단 부단장을 거쳤다.

1967년 수도경비사령부 제30대대장이 되었다. 전두환은 이때 청와대의 경비가 부실하다는 이유를 들어 박격포를 청와대에 설치했다. 그리고 이듬해 벌어진 1.21 사태 때 북한 김신조 일당이 서울로 침투하여 국군과 교전을 벌였는데, 이때 수도경비사령부 30대대장이었던 전두환의 지시에 의해 30대대가 박격포로 많은 조명탄을 계속 쏘아 올려서 밝게 비추어, 김신조 일당의 소탕과 생포에 적잖은 역할을 한다. 이 공으로 전두환은 박정희의 신임을 더욱 얻게 된다.

1969년에 육사 동기들 중 최초로 대령으로 진급한다. 1970년 육군 제9보병사단 제29보병연대 연대장으로 베트남 전쟁에도 참전했는데, 상관들에게 안 좋은 소리를 많이 들었다. 당시 9사단장이자 이후 육군특수전사령부의 2대 사령관인 조천성 장군이 '사병들은 마실 물도 마땅치 않은데 전두환은 뜨거운 물로 샤워하고 테니스나 치고 앉았다'고 29연대장에서 해임시켜야 한다는 보고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게다가 전두환의 연대가 군공이 전혀 없자 전두환은 무기밀매상으로 부터 적성화기 다수를 구매해서 그걸 노획물이라고 속여 상부에 바치며 있지도 않은 군공이 있다고 속였다. 그러나 이 전두환의 거짓말은 바로 들통났다. 전두환이 노획했다는 총기가 사용한 적이 없어 약실과 총열이 깨끗했기 때문이다. 전두환이 무기밀매상으로부터 구매한 무기는 다음과 같았다.

소화기 115정
공용화기 13문
수류탄 42개
실탄 2,191개
포탄 31개
기타 냉병기 등 다수

베트남 전쟁 파병 이후 복귀한 연대장급 이상은 관례에 따라 모두 충무무공훈장을 받았는데, 전두환의 경우는 직속상관인 9사단장 조천성, 그리고 주월사령관 이세호가 모두 전두환에 대한 훈장 수여에 반대한 일화가 존재한다. 이유는 인사 오류 + 민간인 상대 문제 행위 + 작전 지휘권을 참모 이하에게 맡겨 놓은 사례 다수 + 전투 수행 능력 부족 + 무기 밀매 및 적성화기로 거짓 보고 + 연대장 부임 이후 파티가 너무 잦음 등 부정적 평가가 쏟아진 것이다. 결국은 훈장을 수여받았다.

이 일로 전두환의 준장 특별진급은 당연히 미뤄지고 대령이 부대장인 1공수특전단의 단장이 되었다. 그러다가 1972년 9월에 제1공수특전단이 제1공수특전여단으로 증편되어 부대장이 준장급인 보직이 되자, 아직 대령이었던 전두환은 정식 여단장이 될 수 없으므로 제1공수특전여단장 '직무대리'라는 직함으로 계속 부대장을 맡게 된다. 이후 전두환은 1973년 1월에 임기제 준장으로 진급함과 동시에 정식으로 제1공수특전여단장이 되었다.

마침내 전두환은 1974년 1월, 김복동, 손영길, 최성택 등과 함께 육사 11기 최초로 정식 준장으로 진급했다. 이후 1976년 대통령경호실 작전차장보로 임명됐고, 보안차장보직을 겸직하였다. 이후 1977.2.1 전두환은 소장 진급하였다. 소장 2차보직으로 전두환은 1978년1월 사단장 중 가장 요직인 육군 제1보병사단 사단장이 되었는데 1사단장으로 있던 시기에 1사단이 1978.10.17 똘이장군 제3땅굴 편(1978)의 배경이 되는 제3땅굴을 발견하며 성과를 올리게 된다. 이어서 1979년3월에는 요직인 국군보안사령관이 된다. 취임 시기에 일어난 부마항쟁에 있어선 강경진압을 계획하기도 했다.





12.12 군사반란

국군보안사령관으로 재직 중 10.26 사건으로 대통령 박정희가 암살당한 상황에서 국군보안사령관 겸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장 자격으로 10.26 사건 수사를 맡았다. 그러던 중 군사반란을 일으켜 계엄사령관이였던 정승화를 연행하였고, 이후 군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박정희가 그를 임명할 때 차지철을 견제할 목적으로 노재현이 박정희의 각별한 신임을 받는 전두환을 천거한 것을 받아들였다는 것을 생각해본다면, 보안사령관인 그의 권력 순위를 짐작할만할 것이다. 그는 보안사령관에 앉고 주어진 임무대로 차지철, 그리고 김재규를 견제할 각종 방안을 연구하였고 10.26 이후 그 방안들을 바탕으로 손쉽게 권력을 장악할 수 있었다. 이런 점들을 상기한다면 유신 권력의 1인자와 두 2인자가 모두 사라진 이상, 두 2인자를 견제하는 위치에 있었던 그가 부상하는 것은 정해진 수순이었다. 당시 전두환은 6인위원회를 구성하여 장성 진급을 결정하였다.

1980년 3월 1일부로 중장으로 셀프 진급한 후 중앙정보부장 서리를 겸직하였고 5.17 내란을 통한 반란으로 헌정을 중단시킨다. 대통령 직선제 등을 요구한 시위인 서울의 봄 이후 벌어진 5.18 민주화운동을 유혈진압 함으로써 새로운 폭압적 독재 정권을 예고했다. 같은 해 8월 5일 대장으로 진급하고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상임위원장을 거쳐 정권을 장악했다. 이 반란은 아직 김재규에 대한 재판도 끝나지 않은 상황에서 발생했다. 정권 장악 이후 대통령직을 공식으로 이어받기 위해 군 전역을 준비했고 대장 진급 16일만인 1980년 8월 21일에 예편하였다.

전두환은 쿠데타로 집권해 미국과 사이가 좋지 않았기 때문에,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1980년 초 백곰 미사일 사업을 취소한다. 덩달아 플루토늄 반납, ICBM 개발 계획 취소, ADD 해체 등 이전 박정희 정권에서 대미관계 악화에 따라 추진한 자주국방 정책의 방향을 역행시켰다. 국방을 미국에 헌납하고, 미국과 거대 무기 도입 계약을 체결하는 등의 방식으로 미국에게 집권 보장을 받았다.

5.18 민주화운동 유혈진압 이후 전두환은 1980년 8월에 정치인, 군인, 교수, 기업인, 종교인 등으로 구성된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신설함과 동시에 사회악 일소를 명분으로 사회정화운동을 실시하여 정치계와 사회 저변에 대규모 탄압작전을 시작한다. 한국판 굴라크로 불려진 삼청교육대와 삼청계획 5호에 덤으로 낀 사회보호법도 이때 생겼다.

최규하 대통령이 5.18 민주화운동을 명분으로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후 진행된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전두환은 다득표를 얻어 대통령직에 오른다. 한편 이때 선거는 장충체육관에서 소수에 의한 간접 회의로 열렸는데, 이것은 평생 오명으로 따라다니게 된다. 전두환 부부는 심지어 후임 노태우 부부에게 "우리는 체육관 선거로 집권하지 않았어요."하는 말을 듣게 된다.





제11대 대통령

취임하자마자 연좌제를 폐지하고, 야간통행금지, 심야 영업 금지령을 해제했다. 이후 야간통행금지는 잠시 부활했다가 완전히 폐지되었다. 그리고 새로운 헌법개정안을 공고하였다.

집권과 동시에 전직 대통령 박정희를 홀대하는 조치를 하였다. 박근혜의 회고에 따르면, 5공 시절에는 아버지 추도식을 공개적으로 하지 못했을 정도라고. 이런 조치는 훗날 자신도 당하는데 절친이자 심복인 노태우에게 백담사 유배를 당하게 된다. 아무튼 자기 정권의 정당성과 색깔을 국민들에게 어필하고자 겉으로만 그렇게 한 것일 뿐, 12.12 군사반란의 얼굴마담으로 내세우려던 김종필이 양김을 견제할 목적으로 박정희와 유신을 부정하는 발언을 하자, 이를 패륜적으로 받아들여 쿠데타 멤버에서 배제했을 정도로 자신들을 챙겨주고 비호해주며 키워준 박정희를 당연히 존경했다.

정당 해산령을 내려 여러 정당을 해산시킨 후, 1980년 10월 27일에 국민투표를 거쳐 새 헌법을 공포하였다. 그리고 1981년 1월에는 새로 창당한 민주정의당에 입당하고 당 총재에 취임, 그 후 새 헌법에 따른 간접 선거로 제12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제12대 대통령

전두환의 두번째 취임은 언론을 상당히 활발하게 사용한 정치적인 사례였다. 어차피 간접선거라 결과는 뻔했지만, 그래도 구색이라도 맞춰야 했기 때문에 당시 개표생중계 방송을 KBS에서 했고, 초대형 스튜디오를 만들어 전광판으로 실시간 현황을 보였다. 지금과 다른 점은, 명목상 후보가 다수인데도 후보별로 있는 게 아니라 항목이 <찬성>과 <반대> 밖에 없었다는 점. 반대는 겨우 9%나 넘을까 했다. 그밖에 당시 2채널에서 하던 오락 프로그램 100분쇼에서도 전두환 대통령의 축하와 지지로 이루어진 특집 방송을 했었고, 당시 유아동 프로그램에서도 패널들이 전두환 대통령 찬양 일색의 멘트를 날렸다. 게다가 취임 전날에는 취임 경축 전야제라고 해서, 장충체육관에서 밤새 공연했고 이를 생중계했다. 전형적인 독재 국가에서 보이는 프로파간다의 극치였다.

전두환은 취임 후 허문도가 주장하는 3S정책을 시행했다. 스포츠(Sports), 성 개방(Sex), 영상 산업 진흥(Screen)을 3S 정책이라 불렀는데, 이는 한국, 일본에서 공통적으로 벌어진, 정부에 대한 불만을 돌리기 위한 정책이었다. 이에 맞춰 프로야구 및 K리그 등 프로스포츠가 출범했고 1986 서울 아시안 게임과 1988 서울 올림픽 등 국제 스포츠 대회를 유치하였으며, 컬러 텔레비전 수상기를 보급하기 시작했다. 더불어 영화 검열 완화, 야간통행금지 폐지, 두발 및 교복자율화를 실시하여 국민들이 가진 불만을 잠재우고자 했다.

한편 1970년대 후반들어서는 고교평준화가 진행되면서 풍선효과로 대학 입시 경쟁이 매우 치열해졌다. 블루칼라가 일반적이었던 시대라지만 경제력이 증가하면서 자식들을 노동조건이 열악한 블루칼라 대신 상대적으로 급여를 더 많이 받은 사무직에 취직시키려 했기 때문이었다. 이에 전두환 정부는 과외를 폐지하는 강압적 조치를 취하기도 했다. 그러나 사회 전반적인 엘리트화를 전두환은 추구하였고, 청소년 시절에 대학 입시로 자살하는 일이 이때부터 심각한 문제가 되었다.

그 당시 대학은 거의 매일 전투 상태였다. 전두환 정부는 대학생들이 시위를 할 엄두를 못내도록 학원안정법을 제정하고 녹화사업을 실시했으며, 1986 서울 아시안 게임 전까지 학내에 정보형사와 경찰 프락치가 상주하였고 거의 매일 화염병과 최루탄이 오가는 시위가 벌어졌다. 학생들도 사수대라는 민병조직을 만들어 냉병기 훈련을 하고 폭력시위에 앞장세웠으며 그 절정이 동의대 사태와 10.28 건국대학교 항쟁이었다. 86 아시안게임, 1988 서울 올림픽이라는 초대형 세계적 이벤트에 대해서도 학생권에서는 국민들, 특히 도시빈민의 부담을 가중시키고 올림픽을 프로파간다의 수단으로 사용한다고 상당히 반발했었다. 당시 방송국에서는 이들을 '좌경의식분자' 라면서 한창 내리까는 프로파간다를 많이 보도했었다. 그래서 장노년층들에게 학생운동권 출신의 선입견이 많이 안 좋은 것도 그 까닭이다. 학원, 과외 폐지는 전두환이 퇴임한 이후 집권한 노태우 정부 때 현실성이 없다는 문제로 철회한다.

전두환은 집권 직후 록히드 마틴과 F-16 도입 계획을 체결하였고, 전두환 집권을 좋지 않게 보던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은 TV에 나와서 공개적으로 전두환을 지지하는 발언을 하였다. 이는 반미감정으로 이어지게 된다. 1983년 11월 전두환은 한국을 공식 방문한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에게 핵개발 계획중지를 약속하였다. 박정희 대통령 당시 추진한 미사일, 핵 등 자주 국방 계획은 전두환 집권과 함께 폐기되었고, 훗날 노태우 정부는 미사일 설계도까지 전부 없어졌다며 한탄했다. 노태우 시절에 군이 전작권 전환 추진을 제일 먼저 시행한 것은 이 시기의 경험이 크다.

5.18 민주화운동 당시 신군부의 탄압을 방관한 미국에 대한 반감이 커졌다. 한국군의 지휘권은 미국에 있었는데, "어떻게 군대가 이동하여 광주에서 발포하고 학살을 저지를수 있냐?"는 것. 그 당시 매우 심각한 논쟁 거리였다. 또한 그 당시는 유교문화가 사회 저변에 아직 뿌리 깊던 시대라, 광주민주화 운동 당시 시민군은 대국(大國) 미국이 자신들을 도우러 올 것이라 실제로 믿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은 오히려 한국의 무기 도입을 감사해하며 전두환과 웃으며 악수하고 전두환을 지지하였다.

경제 개발이 시작된 1962년대로부터 20여 년이 넘게 경과함으로써 자연스레 산업 고도화가 이루어졌고, 전두환 집권기에 이르면 중화학공업이 한국의 주요 산업으로 자리잡기에 이르렀다. 직전 시대에 터졌던 오일쇼크의 극복 과정에서 대대적인 구조 조정을 하여 중화학공업 내 체질개선을 꾀하는 한편, 김재익을 등용하여 1945년이래 40년 가까이 지속된 높은 물가상승률을 재임 기간 동안 한 자릿수로 떨어뜨렸다. 그러나 성장해 가는 경제 규모에 비해 연간 3천 시간에 달하는 과중한 노동 시간 및 열악한 노동 환경 등 노동자들의 인권은 그대로였으며, 6.29 선언 직후 그간 내내 억눌려있던 노동자의 목소리가 본격적으로 터져나오기 시작한다. 1987년 노동자 대투쟁으로 본격화된 이 목소리들은 후임 노태우 정권 때 절정을 이룬다.

1983년 미얀마 방문 때, 북한 스파이의 표적이 되어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가 일어났으나 그 시각에 현장에 없어 휘말리지 않았다.

1986년에는 최초로 아시안 게임을 유치하고 평화의 댐 건설 홍보를 시작했다.

1987년 초 부산 형제복지원 사건이 터졌다. 전두환 정부와 부산직할시 사회가 노숙자, 행려병자들, 고아들은 물론 심지어 멀쩡한 사람들까지 남녀노소 통금시간 이후에 돌아다니는 사람이란 다 잡아들여서 무차별적으로 끌고 가서 불법적으로 감금 및 강제 노역을 시킨 기관으로, 박인근 원장을 비롯한 관계자들의 갖은 폭행과 살인으로 500명가량의 원생이 사망하였으며 시신은 유기되고 암거래로 대학에 팔려나가는 천인공노한 짓거리를 벌였다. 35명의 원생이 살려달라고 아우성치며 집단탈출한 끝에 사건의 전말이 알려졌음에도 전두환은 "박 원장은 훌륭한 사람이오. 박 원장 같은 사람 덕분에 거리에 거지도 없고 좋지 않소"라고 말하고 압력을 가해 사건을 덮어버린다.

집권 후반기로 갈수록 민주화를 위한 학생들의 투쟁, 경제 성장에 걸맞지 않는 노동 인권으로 민주화 요구는 거세져 갔다. 그리고 이를 억누르는 과정에서 부천 경찰서 성고문 사건,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등 반인륜적 사건사고가 터졌다. 사회의 불만은 더욱 가중되어 갔고 결국 개헌 논의가 시작되었지만, 민정당의 의원내각제 고수로 인해 논의가 지지부진하자 전두환은 다음 대선이 얼마 안 남았다는 이유로 다음 대선은 대통령 간선제로 하고 개헌 논의는 그 이후로 미룬다는 내용의 4.13 호헌조치를 발표한다. 그러나 이에 반발한 국민들이 6월 항쟁으로 들고일어나자, 결국 6.29 선언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전두환 본인은 연임 없이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겠다고 공언했고 제5공화국 헌법 상 대통령의 임기도 7년 단임으로 명시해 두었지만, 그렇다고 권력을 내려놓을 생각은 없었다. 1986년 개헌 논의 당시 민정당이 들고 나왔던 의원내각제나 전임 대통령을 의장으로 한 국가원로자문회의는 전두환이 노태우를 허수아비로 앉힌 채 상왕 노릇을 하려 했다는 정황으로 꼽힌다. 그러나 막상 노태우가 집권하고서 전두환 색채를 지속적으로 자의 반 타의 반 지웠고, 3당 합당을 통해서 여권을 장악하게 될 김영삼의 등장으로 실패하였다.






퇴임과 구속


후임자인 노태우는 이래봬도 체육관 선거가 아닌 직선제로 당선되었다는 자부심이 있었고, 자연히 전두환과 자신은 다르다고 생각했다. 상왕 노릇을 하려 했던 전두환의 의도와는 달리 노태우는 취임 직후 빠르게 동생 전경환의 새마을협회 비리를 캐내며 전두환을 쳐냈다. 직후 서울 올림픽이 열렸는데, 나름 유치에 공이 있었음에도 노태우는 관중 소요 우려를 들어 전두환이 개회식에 오지 못하게 했다. 때문에 전두환은 노태우가 개회식을 선언하는 것을 집에서 TV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이후 1988년 11월, 5공 청문회가 열리자 전두환 내외는 재산을 사회에 반환하겠다는 인터뷰를 남긴 채 11월 23일 강원도 인제군 백담사에 들어가 2년 1개월여 간 칩거하게 된다. 청문회는 5공 시절 은폐되었던 전두환의 전횡을 낱낱이 파헤쳐 단죄하는 게 목표였지만, 정작 전두환을 구속시키지는 않고 일가친척들만 구속하는 선에서 마무리지었다. 다만 이러한 행보로 전두환과 노태우의 사이는 벌어질 대로 벌어져, 전두환은 노태우에게 "그런 식으로 하면 대통령이라도 나한테 귀싸대기 맞는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1993년, 김영삼은 3당 합당을 통하여 창당된 민주자유당에서 주도권을 잡아 구 민주정의당계를 제압하고 대통령직에 올랐다. 이후 임기 중반에 접어든 1995년 말에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은 전격 구속된다. 대한민국 전직 대통령 구속 사건의 시작. 죄목은 반란수괴 · 반란모의참여 · 반란중요임무종사 · 불법진퇴 · 지휘관계엄지역수소이탈 · 상관살해 · 상관살해미수 · 초병살해 · 내란수괴 · 내란모의참여 · 내란중요임무종사 · 내란목적살인 · 특정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위반(뇌물) 로 인한 재판이었다.

김영삼이 취임하고도 한참 있다가 본격적인 과거 청산이 시작되었는데, 사실 이미 12.12사태의 당사자인 정승화 육군참모총장과 장태완 수경사령관 등 22명이 전두환을 고발하였으나 검찰은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라며 공소권 없음을 내세워 거절했다. 그러나 이후 3건의 헌법 소원으로 헌법재판소는 1995. 12. 15. 95헌마221등 에서 성공한 내란이라도 처벌 할 수 있음을 판시하였고, 이 후 국회에서 5.18 특별법이 제정되어 시효 문제를 해결하면서 합법적으로 전두환을 잡아다 법정에 세운 것이다. 노태우 구속은 1995년 11월 16일, 전두환 구속은 1995년 12월 3일.

당시 상황을 보면 검찰에서 노태우를 구속한 직후 12. 12 사태의 집권부터 5. 18까지 피의자 신분으로 전두환을 당시 서울지방검찰청에 1995년 12월 2일 오후 3시에 소환하여 조사를 진행하고자 했다. 그러나 전두환은 이미 위 사건의 진상규명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했으나 정부가 정치적인 이유로 특별법까지 제정하여 재조사를 한다니 자신이 응할 이유가 없고 단지 법을 존중하기 위해 사법부의 조치만 수용할 것이다 는 요지의 '골목성명'을 연희동 자택 앞에서 발표했으며, 발표 직후 현충원에서 5분간 참배한 다음 그대로 고향인 합천으로 내려가버렸다.

이에 검찰은 전두환의 이런 행동을 피의자의 도주행위로 간주, 관할법원인 서울지방법원에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그리고 이게 그대로 받아들여지면서 전두환이 원하는 대로 사법부의 조치에 따라 그 다음날 새벽 합천 생가에서 검찰에 체포되어 그대로 안양교도소로 압송되었다. 뒷이야기로는 사실 처음엔 5.18 특별법 제정 이후 사건에 대한 초기수사를 진행하던 단계여서 검찰은 전두환을 청사로 소환해 일단 불구속 상태로 수사할 계획이었지만 '골목성명'이라는 뒤통수를 맞으면서 대로한 YS와 협의하에 속전속결로 법원에 구속영장을 청구하게 되었다는 일화가 있다. 당시 신문에 보도된 내용에는 안양교도소에 구속된 직후 검찰의 첫 방문조사에서 담당검사가 전두환에게 '화를 자초하셨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어쨌든 출두를 거부하고 도주한 점과 자기 때문에 죽은 순국 군인들이 잠든 현충원에 무슨 낯짝으로 참배했냐는 점에서 욕을 거하게 먹었다.

물론 구속된 전두환이 얌전히 수사에 협조했냐면 당연히 아니다. 구금된 즉시 구속 자체를 받아들일 수 없다며 안양교도소에서 단식투쟁을 보름 넘게 벌이다가 심한 탈진과 영양실조상태에 따른 건강 악화로 1995년 12월 21일 새벽에 국립경찰병원으로 이송되었다. 검진 결과 전해질과 간기능 등 여러 검사가 정상으로 나오고 단식으로 인한 두통과 현기증 등의 탈수증세가 있는 것 외에는 건강에 큰 지장이 없다는 진단을 받았지만 샤워시설, 싱크대, 다용도실, 응접실에 갖추어진 10평 안팎의 VIP특실에서 익년 3월 2일까지 2달이 넘는 70여일 기간동안 입원치료를 받았다. 첫 공판은 1996년 2월 26일에 진행되었는데, 그동안 전두환은 경찰병원에서 푹 쉬고 있었으므로 공판날 교도소 측이 병원을 방문해서 법원으로 이송하는 촌극이 펼쳐지기도 했다. 공판에서 너무 정정한 모습으로 나오자 이를 빌미삼아 다시 안양교도소로 재수감되었다.
재판 진행 과정에서 전두환과 노태우는 구속 이전 1995년 10월경 육군사관학교에서 마지막으로 만난 이후 피고인의 신분으로 1심 재판정에서 몇 달 만에 재회했는데, 오랜만에 보자마자 전두환이 대뜸 하는 말이 "자네 구치소에서 계란후라이 주나?"였다. 노태우는 "안 준다."라고 대답했고 전두환도 "우리도 안 줘."라 대답하며 두 사람의 짤막한 대화는 끝이 났는데, 백담사에 칩거하기 직전까지만 해도 "노태우 그 놈이 아무리 대통령이라도 나한테 이런 식으로 대접하면 귀싸대기 맞는다."라며 서운한 감정을 감추지 못하던 전두환인데, 죽을지도 모르는 일생일대의 위기 앞에서 오랜 사적인 감정을 훌훌 턴 듯하다.

전두환은 1심 마지막 최후진술에서 다음 서면을 제출하며 "그들은 아무 죄가 없다. 내가 다 책임지겠다." 라는 말을 했다.
무기징역이었지만 김영삼은 대선 후 임기 내의 기간에 추징금 회수와 사면을 계획하고 있었으며, 이 계획은 3명의 대선 주자들에게 허가를 구하기까지 했다. 그래서 이 계획은 자서전으로 밝혀진 지금까지도 대선 후보들의 공약과 김대중의 요구란 미명 하에 사면이 진행되었단 이야기가 대중에 많이 퍼져있듯이 당시엔 폭로되진 않았지만, 이인제에 비해 지지도에서 열세에 밀렸기 때문인지 이회창이 추석 전에 둘을 사면시킬 것을 김영삼에게 직접 건의하겠단 발언을 했고, 이로 인해 곧 다가오는 15대 대선 유세에서 김대중, 이회창, 이인제 후보 모두 전두환과 노태우의 사면복권을 대선 공약으로 내세우는 결과로 이어지게 되었다. 결국 15대 대통령 선거 이틀후인 12월 20일, 김영삼 정부는 그를 사면복권 하였다.

당시엔 김영삼 정부 및 이회창, 김대중, 이인제후보가 이 전노 사면을 추진하고 전노사면에 여야 모두 찬성의사를 밝혔던 것이라 전노사면은 이미 기정사실화되었다.

물론 말이 무기징역이지 당시 국민들 중에서 실제 무기징역을 살 것이라고 믿었던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 대법원 판례와 김영삼의 의지로 감옥에 평생 사는것만 면했지 추징금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다들 아시다시피 이 추징금을 29만원 드립을 치면서까지 안 내서 두고두고 문제가 되었다.




출소 후


출소 후 전두환은 군인 시절부터 살던 서대문구 연희동의 안전가옥으로 돌아가 철통경호를 받으며 심심하면 골프를 치러 놀러다니는 등 호화로운 생활을 이어갔다. 퇴임한 이후에는 전직 대통령 초청 만찬이나 관련 행사 등에나 종종 나오면서 아주 태평하게 여생을 보냈다.

2003년 SBS와의 인터뷰에서 5.18 민주화운동을 폭동이라고 발언하여 논란이 되었다.
"광주는…어... 그거는 총기를 들고 일어난 하나의 그.. 폭동이야. 근데, 그러니까 계엄군이기 때문에 계엄군이 진압하지 않을 수 없잖아요?"

또한 같은 해 4월에는 추징금 미납 관련 문제로 재산 추징차 법원에 출석했는데, 자신의 계좌에는 29만 1천원 밖에 없다는 희대의 발언을 해서 조롱거리가 되었다.

2013년 7월 16일 검찰이 시공사 본사와 기숙사, 연천 허브빌리지 등 그의 자택 및 그와 관련된 기업에 전격적인 압수수색에 들어갔다. 압수한 미술품을 경매에 내놓아 낙찰총액 72억 원을 기록하며 마무리 되었다. 아직 약 1,200억 원의 추징금이 남아있는 상태다. 2013년 9월 아들로 하여금 추징금 완납 계획을 발표하기는 했지만, 아직 전부 납부하지는 않고 있다.

2015년 9월까지 추징금을 완납했다는 소식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추징금이 선고된 년도가 1997년인데 26년째 추징금을 완납하지 않은 것이며 물가상승을 감안하면 순수 액수는 줄고 있는 셈이다.
90살까지 여전히 정정한 모습을 보여주며 대통령 취임식, 장례식 등 청와대 행사에 꾸준히 모습을 드러냈다. 김대중, 김영삼 대통령의 장례식은 물론 제2연평해전, 천안함 피격사건 영결식에 참석하였다. 동 시대에 활동했던 김대중, 김영삼 전 대통령이 노환으로 사망하고, 심지어 오랜 동지 노태우 전 대통령도 병환으로 정상적인 생활조차 불가능한 상태로 지내다 2021년에 사망하였던 점과 비교되었다.

전두환은 자신이 집권기간 동안 줄곧 김대중을 탄압하고 내란음모사건으로 사형선고까지 하여 죽이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김대중 대통령은 본인을 자주 청와대로 초청해 국정에 대한 이야기를 서로 나누는 등 전직 대통령으로써의 예우를 충분히 갖췄다. 이점에 대해서 전두환은 김대중 대통령 서거 당시 "항상 감사하고 존경한다"라는 소회를 밝혔다. 그리고 사망 직전 병문안도 갔었으며 사망 때도 영결식장에도 참석해 애도를 표했다.

반면에 김영삼과의 관계는 이후에도 계속 껄끄러웠는데, 전두환은 집권기간 김영삼을 가택연금 시켜버려 아들의 결혼식에도 참석하지 못하게 하였고, 김대중이 미국에서 입국할 당시 김영삼이 마중을 나가려 했지만 전두환이 군인들을 보내 꼼짝도 못하게 하였다. 또한 정계에 발을 딛지 못하게 만들어 버리는 등 재임 당시 김영삼을 줄곧 탄압했다. 결국 인고하던 김영삼은 대통령이 된 이후 하나회와 전두환 정부 인사들을 개박살내고 전 전 대통령을 감옥에 넣어 대통령 예우를 받지 못하게 하였다. 퇴임 후에도 자신을 대통령감이 아니라고 맹비난을 퍼부었고 2010년 전직 대통령회동 자리에서도 김 전 대통령은 현직 이명박 대통령을 포함한 주변 사람들에게 큰 목소리로 "전두환이는 왜 불렀노? 쟈는 대통령도 아니데이. 죽어도 국립묘지는 못간다." 라고 일갈하고, 오찬 시간에 "와인 더 없느냐"는 전두환의 말에 "니는 청와대에 술 처무러 왔나?"라고 망신을 준 사례는 유명하다. 하지만 2015년 김영삼 대통령이 사망했을 때 장례식에 참석하여 조문하며 상당한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그러나 "김영삼을 용서했느냐"는 기자의 질문에는 끝까지 묵묵부답이었다고 한다.





명예훼손 피소


2017년 박근혜 탄핵으로 정국이 어수선한 와중에 은근슬쩍 2천 페이지 분량의 3권짜리 회고록을 내놓았다. 당연히 자신에게 유리한 서술로 점철된 내용이라 비난의 여론이 일었다. 결국 법원에서 전두환 회고록의 발매를 금지하였다. 5.18 관련 내용이 실려있는 1권의 발매만 금지되고 그 이후의 내용이 실린 2, 3권은 정상적으로 발매가 되었기 때문에 1권의 문제가 되는 부분은 까맣게 처리해서 내놓았지만 본질적으로는 바뀐 것이 없어서 그런지 이마저도 다시 출판, 배포가 금지 되었다.

게다가 회고록 중 고 조철현 비오 신부를 ‘가면을 쓴 사탄’, ‘성직자라는 말이 무색한 파렴치한 거짓말쟁이’라고 원색적으로 비난하여 조 신부의 유족들이 전두환을 사자명예훼손죄 혐의로 형사 고소하였다. 그런데 형사 재판을 맡은 재판부가 바로 광주지방법원. 이와 관련하여 이상한 것은 형사소송법에 의해 관할은 범죄지, 피고인의 주소, 거소 또는 현재지로 하되 피고인이 그 관할구역 내에 현재하지 아니하는 경우에 특별한 사정이 있으면 결정으로 사건을 피고인의 현재지를 관할하는 동급 법원에 이송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검사는 범죄의 성질, 지방의 민심, 소송의 상황 기타 사정으로 재판의 공평을 유지하기 어려운 염려가 있는 때 상급법원에 관할이전을 신청하여야 하는데 법률상 관할과 상관없이 고소인 측이 고소장을 제출한 경찰서를 관할하는 법원에 공소제기된 것에 대해 놀랍게도 문제를 지적하는 목소리가 없다시피 한 가운데 당연히 전두환은 재판 연기 및 재판부에서울 이송 신청을 했으나 법원은 5월 28일로 예정되었던 재판의 연기만 받아들이고 이송 신청은 기각하였다. 이후 2018년 8월 27일 첫 공판이 열렸다. 전두환의 변호인 측에서는 전두환 전 대통령이 2018년 들어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다며 불출석하겠다고 밝혔지만 재판부는 "관련 법에서 건강 문제는 불출석의 사유가 될 수 없다'"라고 밝혔으나 형사소송법 제277조(경미 사건 등에서 피고인 불출석)에서 '''장기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금고, 다액 500만원을 초과하는 벌금 또는 구류에 해당하는 사건에서 피고인의 불출석허가신청이 있고 법원이 피고인의 불출석이 그의 권리를 보호함에 지장이 없다고 인정하여 이를 허가한 사건"을 정하고 있다.

전두환은 '도저히 광주에서 재판받지 못하겠다'며 대법원에까지 재판관할 이전 신청을 항고했으나 기각되고, 2019년 1월 7일에는 알츠하이머에 이어서 독감에 걸렸다고 부인 이순자 여사가 대신 인터뷰까지 하며 재판에 불출석하였다. 그러나 건강이 안 좋다면서 골프를 쳤다는 의혹으로 논란이 되었으며, 측근들은 운동과 법정 진술은 다르다고 주장했다. 아무리 봐도 꾀병같아 보였는지 광주지법은 3월 11일로 재판을 다시 연기했고 끝내 구인장까지 발부했다.

한편 2018년 12월 20일에 서울시에서 전두환의 재산을 압류했는데, 그 이유가 세금체납. 금액도 무려 9억 8천만원에 달하며 연희동의 그 대저택도 추징금을 받기 위해 '공매'로 넘어간다고. 전체 땅과 건물을 합친 감정가는 약 102억 원이라고 한다.

그리고 마침내 부인의 동석 하에 2019년 3월 11일 경찰 경호팀의 호위로 재판 출석을 결정하였고 이로써 퇴임 이후 23년만에 피고인 신분으로 법원에 출석하게 되었다. 광주지방법원 장동혁 부장판사의 주재로 열린 첫 공판에서 전두환은 헤드셋을 착용하기는 했지만 거동이 불편하다는 주장과는 달리 명확하게 자신의 육성으로 본인이 기소된 모든 혐의에 대하여 전면 부인했다. 그리고 이전에도 누차 요구했던 재판관할이전 신청도 같이 했으나 이에 관하여 담당판사는 일단 심리를 계속 진행하면서 검토하겠다는 입장을 취했다고도 하며, 다음 공판기일은 2019년 4월 8일 오후 2시 광주지방법원이었다.

근 30년만의 광주 방문에 일대는 난리가 났다. 아침부터 전두환을 규탄하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으며, 전두환을 태운 차량이 도착하자 바로 고성이 터지고 몸싸움이 벌어지는 등 아수라장이 되는 가운데 전두환은 인터뷰를 일체 거부하며 철통경호 속에 실내로 이동했다. 하차 직후 움직이기조차 힘들 정도로 인파가 몰렸다. 법원에서 나올 때에도 소동이 일어나서 쇼크를 먹었는지 사저 귀가길에 신촌 세브란스병원 응급실에 방문하기도 했다.

한편 법원 청사내로 들어가려는 전두환을 한 시민이 제지했다가 경호원한테 발길질을 당해 분위기가 극으로 치닫기도 했다. 한편 법원 옆에 초등학교(광주동산초등학교)가 있었는데, 초등학생들이 전두환에 대해 항의하기도 했다. 또한 언론에서도 다시금 전두환의 악행을 돌아보면서 형제복지원 사건이 자신과 관련되었다는 사실이 재조명되었다.

앞으로 남은 공판기일 내내 이러한 모습이 재차삼차 연출될 것으로 보인다. 유죄판결이 나오더라도 벌금으로 그칠 것으로 보이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지금이라도 단죄를 해야 한다고 난리가 났으며, 그게 아니더라도 이제 구순에 접어든 만큼 과거의 죄업에 대한 참회와 반성으로 국민화합을 위한 메시지와 비록 쿠데타의 수괴로서 집권했을지라도 전직 국가원수로써의 품격을 지키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는 의견이 많다.

2019년 4월 8일 2번째 공판기일에서는 재판부가 '공판준비기일'로 지정함에 따라 피고인의 출석의무가 없어 전두환은 출석하지 않고 변호인만 출석한 상태에서 속행되었다. 이 자리에서 전두환 측 변호인은 "회고록상 문제되는 '거짓말쟁이' 발언은 문학적인 표현이어서 명예훼손의 범의가 없이 단순견해를 표명한 것에 불과하며, 검찰이 제출한 대다수 증거에 '부동의'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러면서 첫번째 공판기일에서 전두환이 재판정에서 조는 모습을 보인 것과 관련하여 재판부에 결례를 끼쳤다며 사과했다.

다음 재판기일은 2019년 5월 13일 오후 2시 광주지방법원. 이 날은 증인심문을 개시하는 공판절차의 본격적인 시작단계에 해당하기 때문에 전두환이 출석할 것으로 예상되었으나 법원은 전 씨의 불출석 허가 신청을 5월 8일에 받아들였다. ‘5.18 헬기사격’ 형사재판, 전두환 출석없이 진행 이후 이 재판은 불출석 재판으로 진행된다.
전두환은 재판 과정에서 지속적으로 알츠하이머 투병 중임을 주장해 왔지만, 2019년 11월 8일 정의당 임한솔 부대표가 전두환이 홍천군의 한 골프장에서 시원하게 골프를 치고, 거동과 의사소통이 원활한 신체건강한 모습이 담긴 영상을 공개하면서 다시 시끌시끌해지고 있다. 이미 법원출석 당일 90살 먹은 노인네가 몰린 인파를 제치는 모습으로 "알츠하이머는 구라 아니냐"는 얘기가 많이 나왔는데 이번 영상이 나오며 "그럼 그렇지"라는 반응이었다.
2019년 12월 12일에는 최세창, 정호용 등 쿠데타 주역들, 그리고 김장환 목사 내외와 함께 강남구 압구정동의 한 고급 중식당에서 인당 20만원씩 하는 호화만찬을 즐기는 모습이 공개되었다. 하필 12.12 쿠테타 40주년이 되는 날 옛 부하들과 모였다는 점에서 영상을 촬영한 임한솔 부대표는 만찬장을 나오는 전두환에게 쿠테타기념회가 아니냐고 질문했지만 전두환은 단순 친목회라고 일축했다. 그러면서 임 부대표는 "알츠하이머라는 전두환이 줄곧 큰 목소리로 대화를 주도했으며, 각하 소리까지 나왔다"는 얘기까지 덧붙였다. 이에 5.18 관련 단체들은 반성 없는 뻔뻔한 태도에 경악하여 비난성명을 내고 여론도 꾀병으로 법원을 농락하는 전두환을 제대로 법정에 세울 것을 촉구하고 있다.

2020년 4월 27일 재판 참여를 위해 광주 법원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10월 5일. 검찰은 전두환에게 징역 1년 6개월을 구형했다.

11월 30일, 광주지방법원이 사자명예훼손죄로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하였다. 이날 재판을 위해 광주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사죄를 요구하던 시위대에게 "말 조심해 인마!"라며 역정을 내서 논란을 빚었다. 그가 광주로 올 때 탑승했던 세단 차량은 광주 시민들로부터 계란과 밀가루 세례를 맞았다.

2019년 들어 신군부의 두 수괴 중 노태우 측은 뒤늦게나마 5.18 유족에게 사죄를 시작했다는 점에서 전두환과는 매우 대비되고 있다.

2021년 7월 5일 전두환은 2번째 재판에 불출석하였다. 그러나 알츠하이머 병력이 있다며 줄기차게 주장해 온 그의 말과는 달리 자택 앞 골목에서 멀쩡하게 산책을 하고, 기자에게 호통치는 모습이 <한국일보>를 통해 단독 기사화되어 다시금 알츠하이머 발병설의 진실여부가 논란이 되고 있다. 하지만 사진과 같이 급격히 노쇠한 모습이나 집주변을 배회하는 행동, 갑자기 호통을 치는 모습을 알츠하이머 환자의 증상으로 볼 수 있다는 반론도 있다.
2021년 8월 9일 전두환은 결국 항소심 3번째 재판에 출석하였다. 전 전 대통령 측 변호인은 '재판부에서 피고인이 출석하지 않으면 신청한 증거나 증인들을 받아줄 수 없다는 취지로 얘기해 부득이 출석하기로 했다'고 밝혔으며, 결국 광주지방법원에서 항소심 재판을 받았다. 그러나 재판 도중에 가슴이 답답하고 숨을 잘 쉴 수 없다고 했으며, 재판장의 동의를 얻어 퇴장하였으나 7분 만에 다시 돌아와 앉았다. 재판 중에 전 전 대통령은 자신의 직업을 묻는 질문에 '직업은 무직'이라고 느릿느릿하게 답했고, 재판장이 '지금은 무직이고, 전직 대통령이셨죠'라고 말하자 '네'라고 답했다. 주소와 등록기준지를 묻는 질문에는 이순자 여사가 옆에서 말해주는 것을 그대로 따라 말하기도 했다. 이후 재판 중에 조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지난 2019년 골프 칠 때랑 친목회 할 때의 모습과 비교해보면 확실히 불과 2년 정도의 짧은 기간 동안 급격히 노쇠하고 수척해진 모습으로 나타났다.

2021년 11월 29일 항소심 결심공판이 예정되어 있었지만 전두환이 사망함으로써 공소기각으로 마무리될 가능성이 높다.






혈액암 진단

사실 나이가 90세인지라 이제 와서 노쇠하고 수척해지지 않는 게 되려 이상한 것인지도 모르는데, 평소 강골에다가 젊었을 때부터 술담배를 좀 한 것을 빼면 건강관리를 상당히 잘 해 온 탓에 노쇠화의 진행이 늦은 것으로 추정이 된다. 하지만 광주지방법원에 출두하였을 때 나이 대비 극도로 정정하던 얼마 전과 달리 여느 90세 노인처럼 수척해져 건강에 이상이 온 것으로 추정되었고, 돌아온 뒤로 건강이 급격히 나빠져 2021년 8월 13일 신촌세브란스병원에 입원했고, 악성 혈액암인 다발성 골수종에 걸렸음이 밝혀졌다.

8월 21일 보도에 따르면 전두환은 다발성 골수종을 진단받은 것이 맞다고 한다. 다만 고령의 전 전 대통령이 항암치료를 받기 어려워 대증요법으로 치료할 것으로 알려졌다.

다발성 골수종은 백혈병, 림프종과 함께 혈액암 3대장으로 불릴 정도로 위험한 병이다. 다만 무슨 병으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고령이고, 친구 노태우가 10년도 넘게 거동도 못 하면서 심하게 투병하다가 죽은 것에 비하면 진행이 빨라 얼마 앓지 않고 죽는 혈액암에 걸린 것은 상당한 호상이라고 볼 수 있다.

8월 25일, 전두환은 세브란스병원에서 퇴원했다. 입원 중 치료가 효과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앞으로는 자택에서 안정을 취하며 약물 치료를 할 것이라고 한다.

민정기 전 청와대 공보비서관에 따르면, 2014년부터 기억력 감퇴가 있어 지금은 현저한 치매로 광주를 갔다온 것과 입원했다는 사실도 기억 못한다고 한다.

2021년 10월 21일, 막내동생인 전경환이 향년 79세로 사망했으며, 불과 5일 뒤인 10월 26일, 자신의 반평생을 함께했던 친구이자 후임자인 노태우가 향년 88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1주일도 안 되는 짧은 시간동안 친동생과 동지가 유명을 달리한 것이다.

노태우의 사망 소식을 들었을 때는 아무 말 없이 눈물만 흘렸다고 하며 정신과 거동이 상당히 불편한 상태라서 빈소 방문은 하지 못했다. 대신 아내 이순자와 장남 전재국이 조문을 갔다.




사망

2021년 11월 23일 오전 8시 45분경 자택 화장실에서 쓰러진 채 발견되었고, 결국 사망했다. 지난 8월 혈액암 진단을 받은 후 90에 가까운 나이 치고 굉장히 건강하던 모습과는 달리 급격히 쇠약해진 모습으로 머지않아 세상을 뜨리라는 예상이 많았는데, 결국 일생의 동지인 노태우가 사망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전두환도 그 뒤를 따르게 되었다.

지난 10월 26일에 노태우가 사망한 지 정확히 4주가 지나서였고, 백담사로 유배를 떠난 지 정확히 33년이 되는 날에 세상을 떴다. 또 생전의 치열한 정적이기도 했던 김영삼의 6번째 기일 다음날에 숨졌다. 자택에서 화장실로 이동하던 중 쓰러져 숨졌다고 한다. 당시 부인 이순자가 쓰러진 전두환을 발견하고 경찰 경호대와 119에 즉시 연락해 심폐소생술을 했지만 119 구급대가 도착하기 전에 심정지 상태가 왔다고 한다. 시신이 자택에 있는 동안 전두환의 최측근 인사였던 장세동 전 안기부장과 고명승 전 3군사령관이 조문을 다녀갔다.

아무래도 이 무렵에는 전두환 본인이 더 이상 삶을 이어가려는 의지가 별로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실 그럴만도 했던 것이 90세까지 장수하며 누릴 수 있는 것도 많이 누렸으며, 막내동생 전경환과 동지 노태우의 죽음 이후 이제 본인도 갈 때라는 것을 직감하여 운명을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이미 전성기를 함께한 사람들이 대부분 세상을 떠난 상황에다가 재판 출석 등으로 인해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 삶에 대한 의욕도 점점 떨어졌을 것이다.

이로써 전두환을 마지막으로 20세기에 집권했던 대한민국 대통령은 전부 세상을 떠났다. 초대 이승만부터 15대 김대중까지 모두 사망했으며, 21세기에 처음으로 집권한 대통령인 16대 노무현도 사망했으므로 현재 생존 중인 사람은 17대 이명박과 18대 박근혜, 전두환의 사망일 기준 현직 대통령이었던 19대 문재인, 현 20대 대통령 윤석열까지 총 4명이다. 후임인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보다 오래 생존한 두 대통령인 전두환과 노태우 모두 사망하게 되어 생존한 대통령들은 사망한 대통령들의 후임뿐이 되었다. 우연히도 전두환부터 노무현까지의 사망 순서는 대통령 직책 역순이다.

노태우의 국가장에서 이철희 정무수석비서관은 전두환의 국가장은 "일고의 가치도 없다."고 밝힌 적이 있고, 민정기 전 청와대 공보비서관도 유족을 대신하여 가족장으로 치르겠다고 밝혔다. 다만 이승만 전 대통령과 윤보선 전 대통령의 예에 따라 운구 과정에서 경찰 경호는 있을 예정인데, 이는 혹시 모를 불상사를 방지하기 위함이다. 이렇게 해서 윤보선 이후 31년만에 가족장으로 지낸 대통령이 되었다.

유언으로 "북녘 땅이 보이는 전방 고지에 백골로 남고 싶다."라고 남겼다. 이 말은 민정기 전 비서관이 밝혔는데, 사망 열흘 전에 만났을 때는 특별한 말은 없었지만, 평소에 회고록의 마지막 부분을 유서처럼 여겨 왔으니 이를 고인의 유언이라고 생각한다고 전했다. 생전에도 "죽으면 화장해서 그냥 뿌려라"고 말하곤 했다. 다만 민정기 본인이 지적하듯이 국방부 협조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기에, 화장한 유골은 자택에 안치되었다. 전방 고지에 묻는 것은 안보적인 문제가 있는 데다, 하나회를 비롯한 전두환의 흔적을 지우고자 하는 국방부와 군에서는 허락해줄 리가 없다. 거기다 본인 유언대로 북녘 땅이 보이는 전방 고지에 묻히든 조상들이 묻힌 합천 선영에 묻히든 친구 노태우처럼 동화경모공원 같은 일반 묘소에 묻히든 묻히기만 하면 전두환에 원한이 있는 이들에게 묘소가 훼손될 것이 뻔하기에 그 어디에서도 안치를 거부해서 자택에 보관되고 있다. 전두환 일가도 어디에 묻히든 묘소가 훼손될 것을 알기에 본인들이 직접 보관하기로 한 것이다.

사인이 명확하기에 부검이나 검시는 하지 않지만 의료기관이 아닌 장소에서 사망했기 때문에 검안은 한다. 빈소는 연세대학교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 차려졌고, 25일 17시에 입관해 27일 8시 발인하여 1개월 전 평생의 동반자였던 노태우가 화장되었던 서울추모공원에서 화장되었다. 이로써 전두환은 노무현과 노태우에 이어 세 번째로 화장된 전직 대통령이 되었다.

한편 전두환의 사망을 공식 발표한 민정기 전 청와대 공보비서관은 전두환이 화이자 백신을 접종 받은 뒤에 건강이 악화되었다며 전두환의 죽음은 백신 부작용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유해는 2022년 2월 10일 시점에도 연희동 자택에 그대로 있는 것으로 보도되었다. 노태우의 묘소인 파주 동화경모공원이 국가장을 치루고 국가보존묘지로 지정되었기에, 전두환 역시 묻힌다면 같은 길을 밟을 것으로 보이나 알 수 없다.

사후 손자 전우원이 가족과 지인의 비리와 범죄를 폭로하고 5.18의 피해자들과 만나서 사죄하고 공개 회견에서 자신의 할아버지는 큰 죄를 지은 죄인이자 학살자이고 민주주의를 역으로 흐르게 했다고 비판하고 집안에서 전두환의 주장대로 5.18은 폭동이고 피해자는 자신의 가족이라고 세뇌 교육을 받았다고 폭로했으며 이후 기자와의 질의응답시간에서 한 기자가 1980년 5월 18일에 광주 일대에서 일어난 사건을 어떻게 규정하는지, 주범은 누구라고 생각하는지를 묻자 다시는 있어서는 안 될 대학살의 현장이자 비극이라고 생각하며 주범은 그 누구도 아닌 자신의 할아버지 전두환이라고 생각한다고 답했다. 손자의 양심선언으로 인해 다시금 그의 망언이 회자되면서 죽어서도 조롱 받고 욕먹고 있다.

2023년 11월 전두환의 안장이 늦어지고 있는 것에 대해 전방 고지에 장지를 찾는 데 난항이 있어서 늦어졌다는 것이 밝혀졌다. 파주시 장산리의 사유지를 매입해서 안장될 전망이다.

댓글